대정읍 문화의 숨결
최남단 방어축제가 열리는 이곳 대정읍은 전통문화와 선인들의 숨결이 곳곳에 가득하고 바다와 맞닥뜨린 뛰어난 해안 절경을 자랑하는 송악산을 비롯 대한민국의 최남단 마라도가 있어 관광객들이 빠짐없이 방문하는 필수 코스로 제주의 대표적인 중심 관광지입니다.
대정성지
대정성은 1416년 현 설치 후 왜구 침입 방지 및 현치수 (懸治所)(懸治所) 보호를 위하여 1418년 봄에 대정현감 유신이 축조하였다.
성은 돌로 축조하였으며 둘레가 4,890척 (1,482m)이고 높이가 17척 4촌(5.3m)이다. 동, 서, 남 삼문이 있었으며 문위에는 문루( 門樓)가 있었다.
서림연대
서림연대는 제주읍성에서 서쪽으로 130리, 대정현성에서 서쪽으로 7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별장 6명, 연군 12명이 별장 1명 연군 2명씩 66개 조로 나뉘어 월 5일씩 망을 보았다.
서림연대는 동으로는 무수연대에 서쪽으로는 차귀진 소속의 우도 연대와 연락을 취하였으며 1899년 발간된 대정 군 읍지에는 폐지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가치가 인정되어 도지정 문화재(제주도 지방기념품 22-2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추사유배지(국가사적 제487호)
국가사적 제487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朝鮮) 시대의(朝鮮) 대학자(大學者)이며, 서예가(書藝家), 정치가(政治家)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이 55세가 되던 조선조 헌종(憲宗) 6년(1840) 10월 1일월1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먼 유배(流配) 길에(流配) 올라 이곳 대정현(大靜懸)에서 헌종 14년(1848) 12월 6일에 풀려나기 전까지 9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유허지(遺墟地)이다.
학예(學藝)에 출중하여 당대의 선구자였던 추사선생의 유배생활은 그동안 누렸던 특권층(特權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함과 고독의 연속이어서 이 시절의 시(詩)와 글에서 유배객의 천연한 심사가 많이 드러나 있다.
귀양살이의 어려움 속에서 서체의 골격이 힘차고 필획의 울림이 강하게 느껴지는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고, 세한도(歲寒圖)를 비롯한 불후(不朽)의 서화들을 남겨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순교자 정난주 마리아 묘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 황사영은 같은 해 11월 5일 처형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당하고 그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정난주는 제주도 대정골에, 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귀향되었다. 정난주는 이곳 대정에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할머니'라 불리며 이웃들의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1838년 음력 2월 1일 병환으로 사망하였으며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였다. 정난주 묘는 보성리 상동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동일리 9번지에 있으며 1994년 9월 25일 천주교 제주교구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정난주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하였다..
대한민국 해방기념비
8·15 광복 이후 순수한 의미에서 민족해방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비는 대정초등학교 교정에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무명교사의 민족교육에 감명받은 대정공립국민학교(현재 대정초등학교) 34, 36, 38회 졸업생들이 5년간 헌금을 모아 1950년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수많은 열사가 나라를 위해 순국했으니 장하도다」 한일합방 조약으로 36년 동안 일찍이 반만년 역사에 없었던 주권박탈이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항복하니 그 속박에서 벗어나 민족의 숙원이 성취되니 통쾌하도다. 우리들은 그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이 비를 세워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고자 한다」라고 적혀있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알뜨르 비행장의 맨 남쪽에 있는 격납고 옆에 탄약고가 있었는데 이곳이 섯알오름 바로 밑이다. 탄약고로 향하는 진입로 100여m100여 m가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고, 서기 1950년 여름 예비검속자(4.3 귀순자 및 평소 사상을 의심받았던 자) 132명이 이 길을 따라 끌려가 탄약고 자리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대정읍민관(현재없음)대정읍민관(현재 없음)은 그 당시 절간고구마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이들은 탄약고 입구에 가까워지자 죽음을 예감하고 신발이나 옷가지 등을 벗어던져서 나중에 유족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전교조제주지부 교과위원회, 4.3 순례)순례) 희생자 수는 상모리 7명, 하모리 8명, 동일리 2명, 일과리 5명, 영락리 6명, 신평리 1명, 보성리 3명, 인성리 4명, 신도리 3명, 가파리 2명, 화북동 1명, 토평동 1명, 서호동 1명, 호근동 1명, 강정동 1명, 하예동 1명, 한림리 4명, 귀덕리 11명, 협제리 2명, 금등리 2명, 판포리 1명, 용당리 3명, 조수리 2명, 낙천리 6명, 저지리 5명 청수리 8명, 고산리 12명, 용수리 12명, 신창리 1명, 산양리 1명, 사계리 4명, 덕수리 2명, 창천리 3명, 감산리 3명, 서광리 2명, 동광리 1명이다. 사살 직후 유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군경이 출입을 금지하여 찾아가지 못하고 전쟁이 끝났다. 희생된 지 7년이 지난 1957년 여름 유족들이 모여서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뼈만 남아 있어서 시신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머리, 팔다리 등을 맞추어 장사를 지내기는 하였으나 정확히 맞추지 못한 탓으로 유족들은 132개의 무덤을 대정읍 상모리 소재 사계공동묘지 옆에 만들고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뜻으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또는 百祖一孫之地)라고 부르고 있으며, 해마다 7월 칠석날 아침에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묘지 조성 후 33년 만에 세웠던 희생자 명단등을 새긴 '백조일손지묘'라는 비석은 5.165.16 이후 두 동강이나 땅속에 파묻혔고,, 서기 1993년 8월 24일 제주도 4.34.3 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위령비를 세웠다.
기타 유적
무릉향사 무릉리 2896번지에 있는 향사는 조선초 안성리에 있던 대정현 객사를 옮겨 마을의 공무를 보던 곳이다. 그 후 무릉지서, 무릉출장소, 모슬포우체국 무릉분국으로 사용되다 방치되어 노후한 것을 남제주군에서 1990년 복원하였다.